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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의 기록

2020년 4월의 기록

Covid-19로 인해 계속 집에서 일한다. 요즘처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때, 원하면 언제든 ‘붉은 돼지’ (紅の豚 / Porco Rosso, 1992)를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아이에게 처음 보여준 지브리 작품은 ‘내 친구 토토로’. 살면서 적어도 한 번, 가능하면 우리 집에도 검댕이가 산다고 믿을만한 나이에 토토로를 만나는 것 역시 행운이다.  

시시덕거리며 아무 글이나 적을 수는 없는, 가능하면 잊지 말아야 할 날짜들이 늘어난다. 개인사를 포함한 역사에 대한 인식 대부분은, 먼저 떠난 사람들을 남달리 기억하는 일이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고, 지난 주도, 그 전 주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온라인으로 급히 전환했던 2학기 첫 번째 블럭이 무사히 끝났고, 과제에 점수를 매기고 있다. 좋은 결과를 낸 학생들에게는 내가 주는 학점이 보상이 되겠지만 (네덜란드 대학 학점은 절대평가고, 난 에이플 폭격기에 가깝다), 다른 쪽 학생들에게는 낮은 점수가 낙인이자 벌이 되기도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선생이 학생을 평가하는 방식은 크게 바뀐게 없다고 느낀다. 맞는 답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은 정확하게 어떤 역량을 반영하는건지, 부분의 합과 평균이 그려내는 전체는 무엇인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5.5라는 숫자는 정확하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학생들이 졸업하고 접할 소위 현실의 세계는 우리의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종이 몇 장에 점수를 매기는 행위가 학생들의 인격과 삶을 평가하는 데까지 손쉽게 이르진 않는지, 그렇다면 난 그럴 자격이 있는지… 늘 머리가 복잡해지는 채점 기간. 

9월 새 학기 계약 갱신부터 정년 보장을 받게 됐다. 에둘러 말할 것 없이 아주 아주 기쁘다. 영주권이 나올 때도 그랬었고,  불확실의 시대를 살며 접하는 ‘permanent’라는 글자는 조금 더 특별하다. 내가 원하면, 이 학교가 건재하는 한 여기서 평생 일할 수 있다는 건데, 먼 미래의 일은 여전히 모르겠고, 당장 내년에 할 일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서로 이름 대신 이니셜을 부르는 회사가 있다. 우연처럼 또 필연처럼 알게 되어 언제든 어떻게든 나도 맴버가 되고 싶은 곳인데, 평소 ‘&’ 맴버로 생각하고 있다고 적힌 엽서를 받았다. 2020년 4월도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는데,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이것!

19분 30초: 마녀 배달부 키키
1시간 2분: 붉은 돼지
1시간 37분: 내 친구 토토로

아이가 퇴근(?)시간 즈음 다락으로 올라왔길래 히사이시조 콘서트 토토로 테마곡 연주를 보여주면서 헤드폰을 씌워줬다. 어릴 적 아버지가 작업실을 비우면, 카세트 데크에 이런저런 테잎을 바꿔 끼우면서 음악 듣는걸 좋아했었다. 서랍처럼 열리는 카세트 보관함을 열면 노란색 도이치 그라모폰 테잎들이 많았었다. 아이는 나와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다. 오디오 세트를 사야할 때인가.  

없어도 일은 잘 할 수 있고, 있다고 일을 더 잘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다락에 놓을 데스크탑 한 대를 구했다 (재택근무와 소비욕은 높은 상관관계가 있는 듯). 타워형 Mac Pro 2012년 모델인데 치즈 강판을 닮아서 Cheesegrater라고도 불린다. 로테르담 소재 한 건축 사무소가 새 오피스로 이사하면서 내놓은 걸 좋은 가격에 가져왔다. 세상에는 수많은 ‘클래식’들이 있지만, 컴퓨터 중에 10년 넘게 ‘여전히 쓸만하고 이만한게 없다’고 평가받는 건 아마도 이 모델이 유일하지 않을까. 겉과 속이 모두 단단하고 정갈하게 디자인되었고, 확장성과 호환성이 좋아 최신 부품과 장치들도 무리 없이 붙는다. 이런 멋진 물건은 직접 써봐야지. 12코어 CPU에 메모리를 96기가로 올리고 NVMe SSD를 부팅 디스크로 잡으면 파워포인트 정도는 무리 없이 돌아가지. 포르쉐 타고 동네 슈퍼 갈 수도 있지, 아무렴 어때. 

호스팅 회사를 바꿨고, 마이그레이션 대신 워드프레스를 새로 설치하고 예전 글을 하나 하나 옮기고 있다. 그런 김에 오래 고집했던 블로그 디자인도 바꿨다. 이럴 때마다 난 오래 고민하고, 이것 저것 뭘 많이 따져보다가 결국 뻔한 결정을 내리곤 하는데, 이번에 고른 디자인은 설치형 워드프레스에 디폴트로 들어있는 2020년 테마다. 

많은 사람들이 Post Covid-19를 예견하고 예측한다. Bond도 별도의 리포트를 냈고, 지난주 딜로이트 리포트도 흥미로웠다. 나조차도 교육 현장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래서, 정말 세상이 얼마나 많이 바뀔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