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공간에서 책의 존재

학습자를 제외한다면, 책의 존재는 ‘학습 공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공간 특성이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책은 때에 따라 가르치는 사람을 대신하거나 능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통의 교실과 강의실에는 개인이 들고 온 교과서와 전공서적 외에 다른 책들이 거의 없다. 아쉬운 부분이다. 사서 분들께 욕 먹기 딱 좋은 얘기지만, 대학의 경우 도서관에 비치된 책들이 강의실까지 내려오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책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거나, 제때 원래 자리로 돌려놓지 않는 문제는 생각, 습관, 시스템의 한계이지 책을 한 곳에 가둬놓아야 할 충분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교실이나 강의실에 큰 책장이 놓여 있고 거기에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면, 거기서 이런 저런 책을 뽑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 공간의 됨됨이가 소위 ‘공부’란 걸 하기에 참 좋지 않을까.

Book Mountain, Spijkenisse, The Netherlands © MVRDV

Book Mountain, Spijkenisse, The Netherlands © MVRDV

제도교육에 진입하여 학습 수준이 올라갈수록 교실에 대한 소유개념, 거기 놓여 있는 물체들의 다양성, 탐구 거리 등은 사라지고 학습 공간은 텅 빈 껍데기로 남겨지는 것 같다. 거긴 오래 머물 이유도 재미도 없는 공간이다. 유치원 선반에 잔뜩 놓여 있는 장난감과 교구들, 초등학교 벽 한 켠에 놓여 있는 조그만 책장 같은 것들이 생각보다 중요한 교육적 의미를 지녔을지도 모르겠다. 재밌는 건 대학원생쯤 되어 공부를 좀 깊이 할라치면 그들의 공간과 주변은 다시 책장과 다양한 책과 개인 물건들로 잔뜩 채워지곤 한다. 난 종종 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에게서 특정 공간에 대한 애착과 몰취향을 발견하곤 한다.

사실 공간에 놓인 특정 물건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연구를 통해서도 이미 다양하게 증명되고 있다. 환경으로 확장되거나 분산되는 인지(Distributed or Extended cognition), 몸에 걸치는 인지(Enclothed cognition), Material priming effect, Target-context binding theory, Encoding specificity effect 관련 연구들은 직간접적으로 물체(혹은 환경이나 공간)와 인간인지의 상호작용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을 담고 있다. 어떤 장소가 배움의 공간이 되려면 다양한 책을, 가능하면 많이, 최대한 가까이에 놓아두는 건 어떨까?

네덜란드 건축그룹 MVRDV가 최근에 설계한 도서관을 보면 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주변에 드러내는 것으로 도서관이란 공간의 정체성을 멋지게 드러내고 있다. 실제 이 도서관 프로젝트는 독서의 필요성과 의미에 대해 (타 지역보다 문맹률이 다소 높은)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프로젝트 이름 “Book Mountain” 도 잘 어울린다. 건물이 유명해진 탓에 다른 지역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긴 하지만, 여튼 이 ‘책더미’ 도서관은 문을 열자마자 인기 최고다.


함께 읽기 (포스팅 주제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약간의 아이디어를 주는 논문들)

  • Godden, D., & Baddeley, A. D. (1980). When does context influence recognition memory?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 71, 99–104. doi:10.1111/j.2044-8295.1980.tb02735.x.
    : 잠수사들은 육지보다 물속에서 학습을 더 잘한다. Target-context binding theory 의 가장 대표적인 예.
  • Adam, H., & Galinsky, A. D. (2012). Enclothed cognition.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48, 918–925. doi:10.1016/j.jesp.2012.02.008.
    : 의사 가운이 가진 상징적 의미와 그걸 입는 행위가 정확성을 요하는 과제 수행능력을 향상시킨다.
  • Kay, A. C., Wheeler, S. C., Bargh, J. A., & Ross, L. (2004). Material priming: The influence of mundane physical objects on situational construal and competitive behavioral choice.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95, 83-96. doi:10.1016/j.obhdp.2004.06.003
    : Material priming 에 관한 정리된 리뷰와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있는 논문. 예를 들어 비즈니스맨을 상징하는 서류가방이 상호 경쟁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

 

Meda Chair – Alberto Meda, Vitra

© Vitra

Designed by Alberto Meda

3층에 쓸 Meda Chair 구입. 공학적으로 정교한 물건들은 대부분 미학적으로도 훌륭하다. 스스로 엔지니어라 불리기 좋아하는 Alberto Meda가 자기 이름을 걸고 만든 의자. 평범한 의자 10배는 족히 넘을 가격이지만, 10배쯤 좋은 의자. 아들 Francesco Meda는 저 큰 이름 “Meda”라는 산을 넘어설 수 있을까.

요즘

2019년 여름이 끝났다. 가족과 함께한 거의 모든 순간들이 소중했다.

신입생들이 왔다. 20개 국가에서 온 80명. 스무 명씩 4 클래스로 나뉘었는데 이들 중 한 클래스의 책임 선생이 됐다. 앞으로 4년 동안, 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학교생활 전반을 살피고 돕는 역할이다. 전 교직원이 긴장과 기대감을 안고 이들을 맞았다. 난 네덜란드 대학의 이런 면이 참 좋은데, 매년 학생들을 기다리고 기대한다. 늘 친절한 건 아니고, 차차 서로 실망도 하겠지만, 어쨌든 우린 이들을 기다렸고,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 이건 학과가 신입생 유치면에서 좋은 결과를 낸 것과 별개의 것인데, 그냥 학생들이 오니 설레는 거다. 어쩌면 이게 네덜란드 교육의 힘일지도.

갑자기 인스타그램이 하고 싶어졌다. 더 읽기 »

Gispen 가구 마음껏 사용기

Gispen official logo © www.gispen.nl

 

네덜란드 학교, 도서관, 회사들은 좋은 책상과 의자를 구입하는데 정말 많은 돈을 쓰는 것 같다. 왜, 어떻게 그러는지 늘 궁금하다. 건축 회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건가? 어느 사무소든 자신들이 설계한 건물에 싸구려 가구가 들어가는 걸 좋아할리 없을테니까. 내가 일하는 Fontys 대학 Rachelsmolen 캠퍼스의 경우, 건축회사 Mecanoo (델프트 공대 도서관을 설계했고, 요즘 Tilburg에서 가장 핫한 공간인 LocHal 인테리어를 맡은 회사)가 80년대 말에 지어진 강의동 “R3” 레노베이션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Gispen이 함께 작업했다고 한다. 덕분에 요즘 값비싼 Gispen 가구들을 마음껏 써보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라운지 체어는 Ellen 2 모델이고, 1층 그룹 활동 공간에 쓰인 가구들은 두 회사가 함께 디자인 한 Hubb 시리즈다. 보통 세트당 일반 소비자 가격이 몇천유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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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 Racing pigeon clock

비둘기 경주에서 사용된 시계라는데, 비둘기 경주라는 게 있는지 이번에 알았다.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저기 달린 시계가 Swiss Made라는 것. 탁상시계로 놓고 쓰기엔 확실히 거대하지만 안될 건 또 뭔가 싶어서 구입.

요즘

내가 감당하기 힘든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지나가고, 시작된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8월이다. 여전히, 난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답을 내지 못한채, 호인이고 싶었으나 아마도 호불호가 선명히 갈리는 사람으로 마흔 문턱을 넘었다. 지난 몇 달, 내 잘못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나를 고치고 싶다는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지만, 일상은 시시콜콜한 것들만으로도 금새 가득 채워지고, 늦은 밤 찾아오는 피곤과 부채의식이 뒤엉켜 잠들었다, 아침이 되면 또 괜찮은 하루, 괜찮은 나를 기대하게 된다. 나를 배반하는 건 언제나 나다. 더 읽기 »

인생 피자

점심에 먹은 맛있는 피자 이야기. Jumbo Foodmarkt에서 살라미 피자에 모짜렐라와 블랙 올리브를 올려달라고 주문했는데, 직원이 나중에 몇 조각으로 자를건지 먼저 물었다. 8등분 해달라고 했는데, 도우를 얇게 펴서, 모서리 근처까지 치즈를 골고루 뿌린 다음 살라미 아홉 장을 정성스럽게 얹었다 (한 장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는 한 조각 당 한 장씩 들어갈 수 있는 일정한 간격). 올리브도 한 조각에 2-3개쯤 먹을 수 있게 일정하게 올리되 두 번 배어 먹을 걸 생각해서 중심부에 가까운 쪽에 하나, 나머지는 조금 멀리 얹었다. 허브도 처음부터 뿌리지 않고 (그럼 나중에 약간 타서 쓴 맛이 난다) 오븐에서 중간쯤 피자를 꺼내 허브를 골고루 뿌리고 다시 오븐에 넣는 걸 봤다. 오븐에서 꺼낸 다음에는 더 읽기 »

Hamra by Collectif Encore

오랜만에 스크렙하고 싶은 건물 발견. 탁 트인 대지, 굴뚝/난로/사다리/지붕/욕조의 활용법, 개방감을 극대화하는 창, 단순한 매스, 콘크리트와 나무의 합, 주택이자 일하는 공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우겨넣으면 대충 이런 건물이 나오는구나.

설계 및 인테리어 디자인: Anna Chavepayre, Collectif encore

사진: Michel Bonvin

https://www.archdaily.com/910867/hamra-collectif-encore

 

요즘

요즘 진저브래드맨에 푹 빠져있는 서진이와 만든 과자. 지난주 쿠키맨을 직접 만들어보자며 파우더랑 장식용 설탕 튜브를 샀었는데, 오늘 보니 집에 버터가 없어서 아이와 슈퍼에 다시 다녀왔다. 버터를 손에 들고 핑크퐁 진저브래드맨 노래를 부르며 신나했다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 모든 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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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3 POLTRONA, Cassina

외출보다 집 안에 있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멋진 암체어는 인생 소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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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핀란드 Tampere에 위치한 TAMK Proakatemia로 출장을 다녀왔다. Tampere는 Tilburg처럼 과거 섬유산업이 견인했던 도시라는데 지금은 젊은 기업들이 옛 공장 건물들을 채워가고 있다. TAMK는 학생 만 명 규모의 대학이고, Proakatemia는 그 중 선발된 150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 직접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지역 기업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종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다. 본 캠퍼스에서 1년을 보내고 Proakatemia로 오면 강의와 시험은 사라지고 Proakatemia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따라 나머지 3년을 보낸다. 학생들은 열정적이었고, 선생들은 차분했다. 그들은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의 학습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에서 이 정도의 공동체성을 발견하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에 들어갈 때 우리는 먼저 신고있던 신발을 벗어야 했다. 이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바가 신발을 벗는 바로 그 순간에 거의 다 담겨있다고도 생각했다. 조금, 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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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교육제도에 관해..

네덜란드 교육제도에 관해 간략하게 정리해봤다. 공개된 정보에 내 의견을 보탰다.

최근 업데이트 (2018년 11월 23일)

출처: The Dutch education system, https://www.s-bb.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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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alia Lafourcade: NPR Music Tiny Desk Concert

이해 할 수 없어도 이해 할 수 있다는게 잘 이해되지 않는 저녁

 

Tap

결혼 10주년

벌써 10년. 한 팀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들.

 

 

디지털 노마드로 일하기

Fontys에서 일을 시작할 때 노트북, 휴대폰과 심카드, 사물함 하나를 받았다. 난 내 방이 따로 없고 ‘Factory’라는 공간에 빈 자리가 있으면 그냥 앉아서 일한다. IT부서나 행정직원들은 대부분 자기 방과 책상이 있는 반면, 학과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학장까지 노트북 하나 들고 빈 자리를 찾아다닌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자료를 PDF로 읽고, 글은 워드에 쓰며, 계산은 엑셀로, 강의 자료는 PPT로 만든다. 함께 쓰는 자료들은 클라우드에 있고, 나 역시 모든 자료를 공유폴더에 저장하고 싱크 시킨다. 브라우저에서 바로 열리는 오피스 도구 덕에 실시간으로 작업하여 공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고 보니 일하는 방식이라는게 이렇게나 빨리,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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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올 여름은 유독 길고 더웠다. 그러다 어느 날 찬 바람이 불더니, 뜨겁고 환하던 여름이 갑자기 끝나버렸다. 물론 휴가도 함께 끝났다. 이 집에서 아이와 처음 보낸 여름은 정말 좋았다. 부엌에서 뜰 쪽으로 난 문을 열어놓으면 아이는 온 종일 집 안팎을 오가며 놀았다. 이 집도 아이를 키우고 있다.

공룡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큰 공룡이고 아이는 아기 공룡이었는데, 배가 고파서 엄마를 먹어야겠다고 하니 아이는 나를 막아서며 그러면 안된단다.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 으어~ 소리를 내며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갑자기 자기를 대신 먹으라고 소리쳤다. 이게 그 아이를 키우다 갑자기 울컥한다는 그런 순간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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